달팽이가 남긴 발자국 따라 현란하게 바쁜 세상 느릿느릿 산보하기
지난해에 《나는 한 마리 개미》(펜타그램 刊)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난 중국의 유명 북디자이너 주잉춘과 교육자 저우쭝웨이가 이번엔 달팽이의 모험과 깨달음을 담은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를 선보인다. 한국에서는 1년이 되기 전에 후속작이 나온 셈이지만, 원서는 집필과 그림 작업, 편집에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나는 한 마리 개미》 원서는 2007년에,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는 2011년에 출간) 《나는 한 마리 개미》를 만났던 독자라면 아마도 독특하고 파격적인 일러스트와 디자인, 가만가만 마음을 울렸던 시적인 글을 금세 기억해낼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달팽이, 세상을 더듬다》도 아름다운 그림과 철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바느질한 옷’ 같은 채색세밀화
전작 《나는 한 마리 개미》가 매우 정제된 느낌의 사실적 이미지를 모던한 방식으로 이용하여 ‘여백의 미’를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달팽이》는 중국 전통 채색화에 세밀화 기법이 가미된 방식을 선보인다. 각각의 장면들이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제각각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 마치 단일한 주제로 엮인 화첩을 펼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여백의 미’는 여전하다. 그에 더하여, 섬세한 붓질로 다양한 동식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부분에서는 전통 화충도(花蟲圖)를 보는 듯하고, 과감한 여백 속에 살그머니 자리잡은 작은 글자들이 그림과 함께 빚어내는 화성에선 문인화(文人畵)의 기운이 슬쩍 감지되기도 한다. 농담(濃淡)의 강약과 부드러운 번짐, 극사실적인 채색세밀화 기법이 조화를 이룬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림의 공간 속에 들어가 노니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달팽이를 기르며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 3년!
주잉춘이 일하는 북디자인 스튜디오 ‘수이팡(書衣坊)’은 난징 사범대학교 캠퍼스 안에 있다고 한다. 캠퍼스 안을 즐겨 산책하는 주잉춘은 동물들과 화초들을 일상적으로 사생했다고 한다.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 ‘천천히[慢]’가 적힌 교통표지판 역시 그의 스튜디오 바로 앞길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 책을 준비하기 시작한 첫 1년 동안에는 달팽이를 직접 작업실에서 기르며 관찰했다고 한다. 그래서 《달팽이》에는 실제로 주잉춘이 목격한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고 한다. 밟혀서 껍데기가 깨진 모습, 껍데기가 깨진 달팽이 위에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 달팽이 여러 마리가 ‘탑 쌓기’를 하는 장면 등이 그런 예다. 표지 디자인 작업에도 달팽이가 큰 몫을 했다고 한다. 암만 해도 마음에 드는 표지 디자인이 나오지 않자 주잉춘은 기르던 달팽이를 백지 위에서 기어가게 하고, 그 족적을 그대로 표지에 이용했다고 한다.
그림 작업을 할 때도 주잉춘은 간단한 마지막 수정작업 외에는 컴퓨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그렸다고 한다. 잠자리 한 마리를 그리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린 적도 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 만하다. 책을 구상하고 완성까지 3년이 넘도록 묵묵히 작업에 정진해온 주잉춘도 달팽이만큼 느리지만 부지런히 붓질을 쌓고 또 쌓아온 셈이다.
주잉춘은 달팽이를 그리는 동안만큼은 달팽이가 되기로 했다. 달팽이가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듯 작업실 문을 걸어 잠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손님도 맞지 않았다. 매 끼니가 라면이다시피 했고, 다른 디자인 작업은 죄다 미뤘다. 서둘러서 될 작업이 아니니, 수행하듯 느릿느릿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꼬박 한 철이 지나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쩍 마른 주잉춘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달팽이 곁에, 동작과 표정이 조금씩 다른 달팽이 그림 수십 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 〈책을 옮기고 나서〉에서
추신: 화면 곳곳에서 조연으로 활약하는 작은 동식물들의 움직임과 사물의 변화를 찾아보는 재미는 《달팽이》 읽기의 ‘부록’이다. ‘숨은그림찾기’를 할 때처럼, 탐정이 돋보기를 들고 증거물을 노려볼 때처럼, 그렇게 들여다보다 보면 의외의 수확(?)을 올리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깨알 같은 재미도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