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재탄생한 매혹적인 고전,
헤르만 헤세의 『밤의 공작새』
글과 그림 사이에서 빛나는 순간을 오롯이 담은 가나출판사 ‘사이그림책장’ 두 번째 이야기 『밤의 공작새』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가 1911년에 발표한 단편으로, 가정생활이 점점 악화되고 창작 활동에도 위기가 찾아왔을 때 쓰였다. 작가로서의 입지는 단단해지고 있었지만 헤세는 이 시기에 불안에 시달렸다. 이런 불안과 내적인 갈등은 작품 세계에 깊게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작품에서 불안은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정면으로 응시하고 탐구한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이 방황하는 마음을 대변해 주는 헤세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헤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자전적이거나 허구적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독립적인 이야기 또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스며들어 있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헤세의 전기를 쓴 베른하르트 첼러는 헤세의 작품들을 “위대한 자화상의 단편들”이라고 했으며, 헤세의 문학적·예술적 유산을 백 가지가 넘는 주제로 분류한 폴커 미켈스는 『밤의 공작새』를 회고록 중 하나로 분류했다. 미켈스는 이 회고록 분류에서 헤세가 자신의 경험과 어린 시절에 목격했던 일, 특히 소년의 첫 도둑질을 “미화 없이 정확한 심리”로 풀어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와 상징적인 메시지로, 헤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이며 매혹적이다. 이번에 엄혜숙의 섬세한 번역과 오승민의 해석이 돋보이는 그림이 더해져 『밤의 공작새』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다. 1911년 아주 먼 곳에서 쓰인 이야기와 지금을 살아가는 오승민 그림의 만남은 글의 의미를 깊고 넓게 확장시켜, 이야기 속으로 더욱 몰입하게 하는 동시에 문학을 읽는 즐거움, 더 나아가 문학에서 그림이 갖는 중요성까지 충분히 느끼고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밤의 공작새』를 펼치면 공작 나방의 날개처럼 매혹적인 세계가 열린다. 특히 나비를 채집하는 장면은 무척 아름답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눈부신 숲의 공기와 그곳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존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지면을 채운다. 적어도 친구이자 경쟁자인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렇다. 곧 나비(나방)는 삼각관계의 중심이 되고, 사랑하는 존재가 경쟁적으로 가치를 재는 사물로 변모하는 과정은 서늘하고 직설적이다.
열두 살 소년의 성장과 내면의 싸움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쉽게 꺼내 보이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의 변화와 혼란을 탁월하게 묘사해 소년의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오승민의 그림은 이야기의 세 겹을 각각 다른 색과 질감으로 쌓아 올려 헤세의 이야기를 더욱 깊게 완성시킨다. 그날의 진실은 마치 렘브란트의 초상화처럼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 속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공작 나방과 소년의 ‘눈’이 마주치며 서로를 비추는 그 순간에 말이다. 어린 시절 성장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다면 이 이야기를 꼭 만나길 바란다.
-한윤아(시각예술비평가)
“위대한 자화상의 단편”
-파괴를 통해 회복을 말하는, 성장 이야기
‘옮긴이의 말’에서 “『밤의 공작새』의 독일어 제목은 ‘Das Nachtpfauenauge’로, ‘Nacht’는 ‘밤’, ‘Pfauenauge’는 ‘공작의 눈’ 또는 ‘공작의 눈 모양 무늬’란 뜻이다. ‘Nachtpfauenauge’는 이 이야기의 제목이면서 중요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정확한 학명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에서 ‘공작 나방’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Nachtpfauenauge’란 단어는 ‘사투르니아’, 우리나라 학명으로는 ‘산누에나방과’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헤세가 지은 제목을 최대한 살려 ‘밤의 공작’이란 뜻과, 아주 예전엔 나비와 나방을 ‘여름 새’라고 부른 것에 착안해 ‘새’라는 단어를 붙였다. ‘공작 나방’이라는 신비하고 깊은 이미지가,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제목에서도 독자에게 가닿길 바라서”(‘옮긴이의 말’에서)다.
첼러가 말했듯이 “위대한 자화상의 단편들”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 ‘공작 나방’은 굉장히 중요한 모티프이다. 욕망과 본능의 대상인 이 드문 동물은 주인공 하인리히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이 신비로운 생명은 하인리히에게 경이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자신의 비밀스러운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천적을 놀라게 하기 위해 날개에 새겨진 이상야릇한 네 개의 눈은 감시와 방어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매혹의 이유이기도 하다. 영혼을 흔들 만큼 빠져들게 하고 파괴적인 세계가 공작 나방의 날개에 고대 지도처럼 새겨져 있다.
“위대한 자화상”이라는 말은 헤세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해당된다. 작품이 거울이 되어 독자들의 내면을 비추고, 삶의 한 조각을 응시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순수한 본능과 욕망, 질투, 죄책감, 끝내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는 소년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매우 가깝게 느끼게 한다. 하인리히가 파괴한 것은 어린 시절의 찬란하고 순수한 순간들이자 어두운 본능, 즉 양면적으로 존재하는 이 둘 모두이다. “한번 망가뜨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본문에서)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한 부분을 부셔서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회복과 성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건 손 쓸 수 없게 된 공작 나방뿐만 아니라,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소년의 내면을 말하기도 한다. 공작 나방은 이로써 성장의 통과의례가 된다. 이처럼 멀고도 깊은 ‘나’에서 온 이야기가 바로 『밤의 공작새』이다. 한윤아의 추천사에서처럼 “어린 시절 성장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다면 이 이야기를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이야기의 겹’을 더욱 깊게 완성시킨 ‘그림의 눈’
오승민은 이 작품에서 ‘눈’에 주목한다. ‘그린이의 말’에서도 말했듯 “『밤의 공작새』의 나비(나방)는 정신분석학에서 영혼·자기 자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눈, 나방 날개의 눈, 에밀의 눈’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반복적으로 그린 눈동자 이미지는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고, 어떤 대상을 인식하게도, 직면하게도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에서 표현된 눈동자 이미지를 통해, 오승민이 창조한 또 다른 ‘공작 나방 날개의 눈‘을 보는 것처럼 이상야릇하고 놀라운, 의외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것이다.
이처럼 본능을 드러내는 눈, 간절한 눈, 혼란스러운 눈, 경멸하는 눈, 매혹하는 눈, 감시하는 눈 등 우리가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눈의 의미지가 힘껏 발휘되었다. 오승민은 “눈동자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렸다고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눈’은 없다. 여기에서 ‘반복’은 무엇인가 꿰뚫어보고 도달하여 직면하게 하는 ‘오승민이 탄생시킨 눈들’의 의도된 장치이다. 그리고 이 의도는 독자의 눈과 마음을 압도한다.
그럼 서사를 이끄는 그림의 연결은 어떠한가. 액자식 구성의 묘미를 살려 현재와 과거를 구분 짓는 프레임을 활용했다. 현재의 밤에서 과거의 낮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구간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뚝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프레임이 확장되고 색이 바뀌면서 새로운 세계, 환하고 아름다우며 순수한 어린 시절로 가는 길은 초록빛으로 찬란하다. 그곳에 하인리히가 사랑한 존재인 나비가 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불청객이 불쑥 끼어든다. 모범생이자 지루한 교사 아들 에밀이다. 이때부터 하인리히의 밝고 환한 초록의 세상은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그 에밀이 공작 나방을 잡았다는 소문을 들은 뒤부터는 아직 보지 못한 공작 나방 날개의 눈이 하인리히에게 계속 따라붙는다. 이때 초록은 물러가고 어두운 색이 하인리히를 지배한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어둠과 밝음의 대비가 아니다. 공작 나방을 취했다가 돌려놓을 때 오가는 계단에서의 불안한 그림자, 드디어 대면한 공작 나방을 바라보는 하인리히의 눈 등 다분히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영역을 포착해 “다른 색과 질감으로 쌓아 올려 헤세의 이야기를 더욱 깊게 완성”(‘추천사’에서)시키고 있다. 한윤아가 “이야기의 세 겹”이라고 말한 마지막 부분은 파괴로 가는 길이자 성장의 통과의례이다. 오승민은 이 길을, 이야기 초반 어른인 하인리히가 창턱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표현했던 보라색과 선들을 다시 소환해 연결되도록 했다.
클라이맥스인 하인리히가 종이 띠를 떼어 내자 모습을 드러낸 ‘공작 나방’의 모습은 실로 굉장하다. 사로잡힌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공작 나방’을 세밀히 모사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이런 표현은 쓸 수 없다. 공작 나방에 새겨진,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늬와 선들은 무의식 속에 자리한 여러 감정과 경이와 불안 등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의 흔적들이 쌓인 것처럼 깊고 깊게 겹을 이룬다.
오승민은 이 작품에서 자기만의 ‘눈’을 여실히 보여 준다. 작가의 그림에도 눈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헤아려 본다. 이처럼 헤르만 헤세와 오승민이 만나 그림책 『밤의 공작새』라는 고전이 새롭게 태어났다.
옮긴이의 말
어린 시절 곤충 채집에 대한 열정, 한순간 남의 소중한 보물을 훔치고 망가뜨린 실수, 자신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는 에밀에게 받은 모멸감 등이 너무나도 섬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눈 모양 무늬가 있는 공작새, 눈 모양 무늬가 있는 공작 나방. 눈 모양 무늬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준다. 공작 나방 날개에 새겨진 눈은 주인공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마치 자신을 지켜보는 눈, 감시하는 눈 같았을 테니까. 청소년기의 강렬한 체험을 담은 멋진 작품을 우리말로 옮길 수 있어서 기뻤다. -엄혜숙
그린이의 말
나는 이 책에서 눈동자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그렸다. 눈은 세상을 인식하는 통로이자 감정을 드러내는 기관이다. 『밤의 공작새』의 나비(나방)는 정신분석학에서 영혼·자기 자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눈, 나방 날개의 눈, 에밀의 눈’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끝내 숨기고 싶어 했던 욕망과 본능을 대면한 뒤, 수치심을 느낀 소년 하인리히가 수집한 나비를 파괴하는 행동에는 자기 파괴를 통해 변화하고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어두운 본능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이야기. 『밤의 공작새』를 다시 만났고, 그릴 수 있어서 기뻤다. -오승민
1974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종대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했고,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그림책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2004년『꼭꼭 숨어라』로 ‘한국 안데르센 그림자상’ 공모전에서 출판미술부문 가작을 수상했습니다.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과 옛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여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엄마 옆에 꼬옥 붙어 잤어요』, 『바람 속으로 떠난 여행』, 『리프카의 편지』, 『못생긴 아기 오리』, 『사진관 옆 이발관』, 『벽이』『진순이 엄마』, 『들소의 꿈』등의 작품에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