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각 재미있는 어문각 픽쳐북스

 

어문각의 ‘재미있는 어문각 픽쳐북스’ 시리즈는 1981년 출판되어 당시 아동 출판계와 디자인계에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전설적인 한국 전래동화 그림책 시리즈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 비엔날레 출품을 계기로 기획되어 우리나라 전래동화 12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국내 저명한 문학인의 글과 아동교육 전문가의 지침을 더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일러스트레이션부터 편집, 제판, 인쇄까지 모든 공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한국 창작 그림책의 시각적·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기념비적인 시리즈입니다.

1. 한국 아동 출판계를 이끈 문학인과 국내 1세대 대표 그래픽 디자이너들, 교육 전문가의 협업 국내 저명한 문학인 12명이 옛이야기의 맛을 살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재미있는 글을 붙이고, 12명의 아동교육 전문가들이 체계적인 학습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살아 숨 쉬는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들에게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주는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김교만(서울대), 김영기(이화여대), 안정언(숙명여대), 구동조(동덕여대) 교수 등 대학 강단에 있던 인물들과 김현·김억(대우실업), 한호림(덕수상고), 이윤영(동양제과), 전갑배(삼미사) 등 대학 강단과 산업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한국 대표 디자이너 9명이 참여하여 각자 개성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정형화된 전래동화의 틀을 깨고 디자이너 고유의 감각으로 한국적인 정취와 미학을 세련되게 구현해 냈습니다.

2. 외국 서적 복사 관행을 탈피한 주체적인 창작 시도 당시 국내 아동 출판물 대부분이 외국 서적을 복사하여 들여오던 관행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국내 창작 그림책을 기획해 낸 과감한 시도였습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상당한 일러스트레이션비와 원고료 등의 위험 부담을 안고 진행해야 했던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우리 그림책의 자립 기반을 다졌습니다.

3. 글 중심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그림이 단순히 글을 보조하거나 보완하는 ‘삽화’의 범주에 머물던 시절, 그래픽 디자이너가 일러스트레이션부터 편집, 제판, 인쇄 등 전 공정을 주도하여 전면에 나선 국내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화가나 만화가의 전문 분야로만 인식되던 동화책 영역에 그래픽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글에 맞먹는 일러스트레이션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출판계와 대중에게 널리 인식시킨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내 그래픽 디자인 분야가 광고나 기업 홍보 쪽에 편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어린이’라는 순수한 주제로 시각 작업을 본격화하여 디자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1년 12월 2일 롯데쇼핑 전시실에서 열린 출판기념 원화 전시회에는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어린이와 부모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루며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습니다.

4. 국제 디자인 비엔날레 출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의 서막 이 시리즈는 1979년 가을, 디자이너 김현과 김교만 교수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리는 ‘제9회 브르노 국제 디자인 비엔날레’의 출품 요청 우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평소 외국 어린이 그림책을 수집하며 독창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고민하던 김현 디자이너는 우리 전래동화인 ‘심청전’을 선택하여 그림책 디자인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김현 디자이너는 본업인 대우그룹에서 일하며 틈틈이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기존 일러스트레이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양 자수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했으며, 독특한 질감을 살리기 위해 촬영, 제판을 거쳐 견본용 인쇄물까지 완성하는 빠듯한 일정을 몸살을 앓아가며 소화해 내어 비엔날레에 성공적으로 출품했습니다. 비엔날레 이후 김현 디자이너는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전래동화일지라도 ‘일러스트레이션의 임팩트’에 따라 독자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고 감동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에 작품을 펼침 12장면(24면)으로 구성하는 구체적인 그림동화책 양식을 설계하고 뜻을 같이할 디자이너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5. 유수 출판사들의 거절과 인세(로열티) 조건을 둘러싼 갈등 새로운 기획을 들고 국내 유수의 여러 출판사를 찾아갔을 때, 출판사들은 참신한 기획과 소위 ‘높은 삽화료’ 지급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인세(로열티)를 지불하는 조건’에는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디자이너나 출판사 모두에게 불확실한 투자였기에, 비용을 줄이고 판매량에 연동하자는 합리적인 제안마저 기존 관행에 가로막혀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년 가까이 난항을 겪던 중, 1981년 초 어문각의 안정언 교수를 통해 돌파구가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어린이 잡지 '새소년'과 '클로버문고'로 큰 성공을 거두고 유아용 동화 그림책을 기획 중이던 어문각의 담당 부장이 김현 디자이너의 제안에 깊이 공감하여 김영환 사장을 끈질기게 설득해 냈습니다. 그 결과 디자이너 9명, 저명 문학인 12명, 아동교육 전문가 12명이 참여하는 아동물 출판계의 역사적인 협업이 성사되었습니다.

6. 국내 최초 ‘러닝 로열티 방식’ 도입과 저작권 인식의 선구적 모델 그림책을 매절 방식으로 지불하던 오랜 관례를 깨고, 권당 기본 원고료 50만 원에 만 부 이상 판매 시 7.5%의 인세를 지급하는 ‘러닝 로열티 방식’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습니다. 이는 늘 ‘을’의 입장에 머물던 디자이너가 정당한 권리를 가진 ‘갑’으로 변모하는 계기이자 저작권 인식을 일깨운 파격적인 혁신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이후 바른손의 1982년용 카드 제작 등 다른 디자인 산업계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혁신적인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출판 유통과정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장벽과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문각은 1983년 초 2차 시리즈인 해외전래동화(12권) 출간을 계기로 일정 금액을 받고 출판 사용권을 전부 넘기게 되는 아쉬운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비록 현실의 벽 앞에 멈춰 섰지만, 한국 출판 디자인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선구적인 아카이브입니다.



5권의 그림책이 있습니다.